선은 나를 그린다
線は、僕を描く
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제59회 메피스토상을 수상한 도가미 히로마사砥上裕將의 데뷔작이 감독 코이즈미 노리히로에 의해 영화화되었다. 2020년 서점대상 3위에 오르기도 한 이 작품은 소중한 가족을 잃고 상심에 빠진 한 청년이 ‘수묵화’를 매개로 치유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청춘소설이자 예술소설이다. 예술이라고 하면 거창하고 심오한 세계를 떠올리기 쉬우나 이 작품에는 먹물을 머금은 붓의 끝에서 피어나는 또 다른 세상을 바라보며 그 신비함을 눈에 담음으로써 스스로도 용기를 얻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. 흰색의 대형화폭에 붓이 그려가는 선을 따라 형태를 갖추어가는 그림은 마치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 듯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. 섬세한 명암의 활용과 다채로운 기법으로 인해 검은색조의 수묵화는 컬러풀한 그림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던 농도 깊은 이야기를 전하는 것처럼 느껴진다.
대학생 아오야마 소스케는 대학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전시회장 짐 운반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현장에서 운명의 만남을 이룬다. 흰색과 검은색으로만 표현된 “수묵화”를 바라보다가 문득 눈물을 흘리는 소스케. 그런 그에게 말을 걸어온 이는 수묵화의 거장 시노다 고잔이었다.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고잔의 마음에 든 소스케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‘애제자’로 발탁되고, 권하는 대로 붓을 들자 어린아이가 된 듯 선을 그리는 즐거움이 샘솟는다. 난생처음 붓을 잡아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도, ‘생명’을 ‘선’으로 그려내는 예술인 수묵화의 세계에 점차 매료되어가는 소스케. 재난사고로 부모님과 여동생을 잃고 깊은 슬픔에 휩싸인 채 무기력한 상태로 멈춰있던 그의 시간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. 소스케의 존재는 고잔의 손녀이자 신진 수묵화가인 치아키에게도 좋은 영향력으로 다가오고, 막혀 있던 물꼬가 트이는 계기가 된다. 함께 성장하는 두 청춘남녀의 상실과 재생의 이야기가 아름답게 펼쳐지는 작품이다.
<등장인물>
아오야마 소스케: 요코하마 류세이
우연한 계기로 수묵화를 배우게 되었고, 그 세계에 매료되어 가는 주인공. 다양한 만남을 통해 내면에 간직한 수묵화의 재능을 꽃피운다.
시노다 치아키: 키요하라 카야
수묵화의 거장 시노다 고잔의 손녀. 떠오르는 신진 화가. 소스케에 의해 자극을 받게 된다.
시노다 고산: 미우라 토모카즈
수묵화의 거장. 소스케를 한눈에 알아보고 제자로 맞아들이기로 결정한다.
니시하마 고호: 에구치 요스케
고산의 수제자. 평소에는 요리와 잡일 등을 도맡아하며 후배들을 따뜻하게 지켜보고 있다.
토도 스이잔: 토미타 야스코
수묵화가이자 유명한 평론가
고마에 타쿠미: 호소다 카나타
소스케의 친한 친구로 수묵화를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.
카와기시 미카: 카와이 유미
소스케의 대학 동급생. 고마에와 함께 수묵화 동아리를 설립한다.
수묵화란 우리에게도 익숙한 예술분야다. 매난국죽梅蘭菊竹 사군자로 대표되는 먹의 회화. 난을 치는 양반의 모습은 시대극에 흔히 등장하는 장면이니 말이다. 어렸을 땐 벼루에 먹을 가는 작업부터가 지루한데다 마음처럼 만들어내지 못하면서도 반복되는 선긋기 또한 싫증이 나기 일쑤였는데, 세월이 흘러 멋진 그림과 글씨를 만날 때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.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졌더라면 비록 예술가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고상한 취미 정도는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. 그야말로 얼굴선이 아름다운 배우 요코하마 류세이와도 잘 어울리는 선의 예술을 실컷 감상할 수 있는 영화다. 미묘한 감정과 고요한 갈등이 온화한 분위기 속에 담담하게 흘러간다. 연애라든가, 고생이라든가, 선악이라든가, 하는 오락적인 요소를 배제한 채 은근한 멋과 맛을 품은 드라마로, 별다른 사건이라 할 만한 게 없는데도 신기하게 재미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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